노년기의 스트레스와 우울증
노년기의 스트레스와 우울증
1. 노인의 지위 변화와 스트레스
사람의 평균 수명이 점점 길어지고 노인 인구의 비율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60세가 되면 회갑잔치를 하고 친지와 후손들로부터 그만큼 살아온 것에 대한 축하를 받는 전통적인 의식도 이제는 그 의미가 많이 희석되어졌다. 55세면 요즘에는 아직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나이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정년퇴직 연령은 55세에서 60세 사이가 제일 많다.
일을 잃고 사회적인 활동을 중단한다는 것은 본인이나 사회적으로 볼 때 큰 손실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수십년간 경험을 통해 쌓여온 노인들의 지혜가 가장 중요했다. 또 농경 중심에서는 땅이 모든 생산의 바탕인데 통상적으로 땅의 소유자는 그 집안의 가장 어른이었으므로 노인들은 자연히 존경을 받게되고 가정과 사회에서 굳건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산업. 정보화 사회는 엄청나게 불어나는 새로운 지식들을 빨리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젊고 활기찬 노동력에 의해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지금의 사회는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와 새로운 지식, 그리고 강하고 힘찬 노동력을 요구한다. 노인들은 자연히 소외되고 사회와 가정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2. 스트레스와 우울증
노년기에 가장 흔한 두 가지 정신장애는 치매(dementia)와 우울증이다.
노년기에 들면 더 우울증이 많아지느냐 하는 데에는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노인들은 정신과의사를 잘 찾지 않는 경향이 있고 또 이들이 내과 등을 방문하더라도 타과 전문의사들이 노인들의 정신과적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용이치 않다. '노인들에게 무슨 심리적 갈등이 있겠느냐'하는 마음도 있고 '노인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란 다 뻔한 것 아니냐'는 등의 일종의 역전이countertransference: 의사가 자기 자신의 어렸을 적에 매우 가까운 관계였던 사람들, 대개 부모들에게 가졌던 감정을 그대로 환자에게 옮기는 것을 말함)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들의 관심 부족도 정신장애를 간과하게 하는 한 요인이다. 어쨌든 노인들의 우울증은 다른 연령 군에 비해 정신과적으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래도 그 빈도가 타 연령 군과 비슷한 것을 보면 노년기에서 우울증이 더 많지 않나 짐작케 한다.
3. 증례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노년기에 우울과 불안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된 72세의노인 여자환자 김 0 0 할머니는 불면, 불안, 우울증, 순간적인 분노감 등을 주소로 자녀들과 함께 정신과 외래를 방문하였다.
원래 양갓집에서 철저한 유교식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온 환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현재의 남편과 결혼하였다. 남편은 한살이 아래였고 역시 명문가의 3대 종손이었다. 결혼한지 6개월만에 남편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전통적인 유교 가문의 맏며느리로서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부모 뿐 아니라 시조모의 시중부터 모든 가사일 들이 온통 환자의 부담이었다.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어떻게 출산했는지 기억도 없고 낳은 지 사흘만에 잃고 말았다. 남편은 방학 때나 한번씩 들리지만 온통 바쁘기 짝이 없고 부인과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갖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 많은 시동생과 시누이들의 뒷바라지도 환자의 몫이었다. 가족들이 많다보니 말도 많고 모함도 많았다. 어린 나이에 혼자서 눈물로 지샌 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순응하는 것이 양반집 여인으로서의 절대적인 처신이라고 믿었다. 남편과 정분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딸을 일곱씩이나 두었다.
젊은 시절엔 잠을 푹 자본적이 없다. 항상 일에 시달리고 사람에 시달렸다. 남편도 공직에 재직하면서 전근이 많았고 가정에는 월급이나 갖다주는 정도로 무관심했다. 남편 자신은 사회활동도 활발하며 술도 좋아하고 호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었고 환자는 이 아들도 정성스레 키웠다.
자녀들이 다 결혼하고 남편이 병들기까지 환자는 한번도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정년퇴직쯤 되어 남편은 고혈압과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반신불수에 거의 실명상태가 되었다. 시부모도 돌아가셨고 자녀들은 모두 결혼하여 각각 독립하였다.
이제 남은 가족은 노부부뿐이다. 아무도 환자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렇게 권위적이던 남편은 이제 환자의 도움만 기대하며 철저하게 의존적이며 과거를 뉘우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우울한지 알 수가 없다.
과거가 생각날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온 가슴과 머리가 불덩어리 같아지며 불구가 된 남편이 측은하기보다는 밉기가 이를 데 없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 단순한 물음에도 폭발적인 분노가 치밀고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욕설이 입 밖으로 마구 쏟아져 나온다. 자신도 놀라고 주위 사람들도 놀란다. 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과거에 대한 원망을 거둘 수가 없다.
자신의 생이 너무나 안타깝고 돌이킬 수 없는 젊음을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밤이 되면 옛날에 어렵고 원통했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다
4. 어떤 증상을 주로 호소하는가?
일반적인 우울증의 증상을 다 나타낸다.
울적함, 의욕상실, 무력감, 고독감, 이유 없는 슬픔, 불면, 식욕저하, 허무감, 과잉한 걱정 등이 주된 증상들인데, 노년기 우울증은 특히 초조함과 안절부절못함이 심하여 '초조성 우울증'이라고도 한다. 방안을 초조히 왔다갔다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하는 경우도 자주 본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많고 질병, 빈곤, 죄악, 허무의 망상을 보인다.
노인들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우울증의 증상보다도 다음과 같은 신체적 증상이 주로 나타남으로서 흔히 조기 발견을 놓치고 병을 악화시키거나 심하면 자살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노년기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한 기분', '죄의식', '열등감' 등의 정서적인 측면보다 동통, 불면, 식욕저하, 체중감소, 두통, 소화불량 등의 신체화 증상을 주로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내과, 정형외과, 신경과 등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고 대개는 별 뚜렷한 진단을 받지 못하고 이병원 저병원으로 표류하는 수가 많다. 특히 식욕 감퇴와 체중감소는 악성 종양의 징후이기도 하므로 두 질환의 감별이 필요하다
5. 노년기 심리와 해결과제는?
에릭 에릭슨이란 심리학자는 노년기를 인간의 마지막 발달 단계로 보고 이 시기는 통합(integrity)이냐 절망(despairs)이냐의 갈등에 처하는 시기로 보았다.
노년기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회상하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성취와 좌절 등을 반추하고 "이 모든 것들이 '나' 란 존재로 연유한 것이며 내게 기쁨과 행운을 주었던 사랑도, 또 내게 슬픔과 분노를 주었던 사람들과의 만남도 결국은 내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며 나의 숙명이었다"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노년기에 모든 원망, 증오와 분노를 스스로 내적으로 통합시킴으로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자연스럽게 앞으로 닥쳐올 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처하게 되는데 이를 통합이라고 한다.
반대로, 과거에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운명적인 것을 부인하고 원망하며 자신이 당한 모든 불행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다른 사람의 또는 시대와 사회의 잘못 때문이라고 이를 원망할 때 노년기에 마음속의 불안은 더 커지고 분노와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되면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하지를 못하고 두려워하며 따라서 각종 건강염려증(hypochondriasis)이나 신체화증상(Somatization)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를 절망(despaire)상태라 한다. 상기의 환자는 소위 이 시기의 심리적 과제인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상태에서 우울장애로 고생하고 있는 전형적인 한 증례이다.
6. 치료는 잘되는가? 어떻게 치료하는가?
노년기에 발병한 우울증은 대체로 청년기나 장년기에 발병한 우울증에서 보다 예후가 좋지 않다. 뇌 자체의 노화에 의해서 회복력이 떨어져있고 노인들에게서는 환경적 변화도 그리 쉽지 않다.
특히 약물에 대한 흡수, 대사 등이 저하되어 있어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많이 나타나 충분한 용량을 사용하여 치료를 못하는 수가 많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항우울제들은 혈압강하작용(orthostatic hypotension), 기억력장애, 장운동저하 등의 항콜린성 효과(anticholinergic effect)가 있으므로 약물 선택 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비교적 이들 부작용이 적은 약물인Desipramine, Nortriptyline 등의 사용이 바람직하다. 노인들은 기립성 저혈압으로 쓰러지기를 잘하며 골절상을 입는 경우가 많고 또 항콜린성 작용에 의한 심장이상이 많기 때문이다.
최근 약 10년 동안에 이런 부작용을 많이 해결한 항우울제들이 계속 도입되고 있어 노인들의 우울증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괴거의 약물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입마름, 졸림, 변비, 체중증가, 심장장애 등의 노인들이 견디기 힘든 부작용들이 거의 제거됨으로써 노인 환자들이 보다 수월하고 안정하게 치료받게 된 것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기충격요법(Electroconvulsive therapy: ECT)이 노인들에게 매우 효과적이다. 우선 상기의 약물 부작용들을 배제할 수 있고 비교적 빠른 치료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달리 최근의 전기충격요법은 마취 하에서 이루어지므로 실제적인 경련이 없어 골절상등의 염려도 없다. 역학적 통계에 의하면 항우울약물만으로 치료할 때 6개월 내 회복되는 경우가 70%인데 전기치료와 약물복용을 병용할 경우 85%의 노인 우울증 환자들이 6개월 내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때로는 매우 난치의 만성적인 우울증이 노인들에게는 많은 편이다. 정신 자극제인 카페인(Caffeine), 리탈린(Methylphenidate)등이 효과적이란 보고도 있다.
지지적인 정신요법을 꼭 병행해야한다. 실제로 닥친 상실에 대한 비애감을 극복케하고 과거를 회상함에 있어 잘못된 인간관계에 의한 분노를 내성적 통찰을 통하여 해결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해준다.
7. 자가측정 간이척도
1. 현재의 생활에 대체적으로 만족하십니까? 예, 아니오
2. 요즈음 들어 활동량이나 의욕이 많이 떨어지셨습니까? 예, 아니오
3. 자신이 헛되이 살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예, 아니오
4. 생활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까? 예, 아니오
5. 평소에 기분은 상쾌한 편이십니까? 예, 아니오
6. 자신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 같아 불안하십니까? 예, 아니오
7. 대체로 마음이 즐거운 편이십니까? 예, 아니오
8. 절망적이라는 느낌이 자주 드십니까? 예, 아니오
9. 바깥에 나가기가 싫고 집에만 있고 싶으십니까? 예, 아니오
10. 비슷한 나이의 다른 노인들보다 기억력이 더 나쁘다고 느끼십니까? 예, 아니오
11. 현재 살아 있다는 것이 즐겁게 생각되십니까? 예, 아니오
12. 지금의 내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십니까? 예, 아니오
13. 기력이 좋은 편이십니까? 예, 아니오
14. 지금 자신의 처지가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느끼십니까? 예, 아니오
15.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처지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아니오
[ 출처 : 건강길라잡이 ]